칠언율시의 차성가가 나오게 된 배경

김차웅 글

장수수 승인 2024.12.20 22:48 의견 0

칠언율시의 차성가가 나오게 된 배경

고전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차성가(車城歌)>는 기장현을 구석구석 노래한 작품으로서 현재 이 가사만이 있는 것으로 알겠지만 그러나 작품성이 뛰어난 또 다른 칠언율시의 <차성가(車城歌)>가 전해오고 있어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전자의 작자는 작품의 서문에서 보듯 기장읍내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 선비임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학계 등지에서 나온 여러 자료들을 보면 작자의 이름이 명시돼있음으로 이를 참고하면 될 것 같다.

국한문으로 된 차성가에 대한 글은 몇 차례 있었다. 미리 고백하지만 글을 쓰다보면 같은 문장이 반복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쓴 ‘양설에서 찾아야할 차성가의 작자’란 글의 일정 부분, 인용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국한문으로 된 차성가와 칠언율시의 차성가는 서로 연관성이 있음으로 이를 설명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작품의 제호와 작자에 대해 공감했던 것은 차성가란 새로운 작품의 배경이 주는 시대적인 유사점과 이미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첨으로 찾아낸 칠언율시의 차성가는 필사본으로서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 가면 열람이 가능하다. 이 칠언율시의 차성가는 글자의 수가 모두 112로 구성돼있으며 1863년, 기장현감이던 도촌(道村) 정태원이 지었다고 자료에 나와 있다. 도촌의 경우, 작품이 수록된 책명은 없으나 112자로 된 칠언율시 다음에 실린 “등망해정유감(登望海亭遺感)”의 작품 끝에 “세재계해6월7일도촌제(歲在癸海六月七日道村題)”란 내용이 나오고 또한 1865년에 지은 <종연설(種蓮說)>이란 산문 속에 정태원의 호인 도촌이 들어있기 때문에 알 수가 있다.

작품에 나오는 망해정의 위치는 부산 기장군 일광읍 문동리 문상마을의 해창 옆이다. 해창이 있었기에 망해정이란 정자가 설치된 것으로 봐진다. 해창은 어떻게 하여 만들어졌을까. 이의 유래를 알아본다. 기장의 향토지인 <구기장군향토지(1992년)>에 의하면 “옛날에 해창을 세우려고 택일을 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방목을 붙였더니 그날 밤 그 방목이 바람에 날려 문상마을에 떨어졌다. 기장현감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와서 보고는 그 자리가 좋다하여 그곳에 해창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기장현감인 도촌 정태원은 해창의 유래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장읍내에서 생장(生長)했던 젊은 문장가인 죽와(竹窩) 김은후, 이오(而五), 경원(敬元)선생과 함께 유서가 깊은 문동리 해창 옆의 망해정에서 칠언율시의 시를 지었던 인물이다. 위 향토지의 [해창지]편을 보면 죽와, 도촌, 이오, 경원의 순으로 {망해정} 시 4수가 수록돼있는데 죽와 김은후의 시가 현감인 도촌 정태원보다 먼저 소개가 된 것으로 봐 장원한 것으로 생각이 되고 죽와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학에도 조예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작품의 내용은 어떤가. 네 사람의 ‘망해정’시 가운데서도 죽와의 시가 가장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를 읊었던 장소가 환곡을 내주는 해창과 이름있는 정자가 있는 바닷가로서 이의 풍광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죽와 김은후의 시를 떠올려본다.

바람도 화창하고 물결도 조용하여 즐겨 놀만한데/ 이름난 정자하나 바닷가에 있네/ 저 멀리 푸른 산은 외로운 섬일런가/ 망망하게 떠가는 돛대는 흰 갈매기인가/ 장관은 동해에 솟는 일출인데/ 환곡내주는 지금은 보리가을일세/ 고된 일에 병들어도 하여야할 일/ 속내 털어놓자니 백성 시름 아님이 없네.

도촌 정태원은 시에서 “남도 천리에 와서 보니 망해정이 있는 여기가 해 돋는 곳이었다.”고 하였다. 작품에서 보듯 죽와와 도촌은 문우로서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돈독했음이 느껴진다. 호가 도촌인 기장현감 정태원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통훈대부로서 <기장현의 향안(鄕案)>과 같이 “인천에 거주했던 무관출신으로 1861년6월, 기장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1863년6월, 좌병영 우후로 이임했다.”고 그렇게 기록돼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죽와 김은후와 망해정에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이 있는 시기에 정태원이 국한문으로 된 차성가와 똑같은 제목의 차성가를 지었다는 점이다. 왜 일까. 모르긴 해도 우연이라 하기엔 뭔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감 정태원의 입장에서 보자. 국한문으로 된 기존의 차성가가 기장현의 곳곳을 읊은데 대해 자기로선 기장지역에 대한 관민의 실상과 시대상을 보면서 이를 시로 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칠언율시의 차성가가 경쟁적으로 나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작품이 쌍벽을 이룸으로써 기존의 차성가에 대한 작품성을 다시 조명해보는 계기로 삼아야할 것 같다. 재밌는 것은 양설이 있는 국한문으로 된 차성가의 말미와 같이 112자로 된 칠언율시의 차성가도 작품에서 보듯 역시나 강구연월(康衢煙月)을 노래하고 관민이 혼연일체가 되는 등 당시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태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하겠으며 이 칠언율시의 차성가를 소개하는 것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태원이 지은 칠언율시의 차성가를 한역하면 다음과 같다.

차성가

- 제금당(製錦堂) 앞에 직금루(織錦樓). 수(水)와 육(陸)을 겸한 변방의 고을. 베 값은 다달이 관아로 보내지고 배 삯은 해마다 왜놈을 먹이네. 선비들은 태평이라 하여 강습(講習)을 하고 노인들은 풍년이라 하여 농요(農謠)를 읊어대네. 관아 뜨락에 아전 물러나고 고을원은 할 일없어 거문고와 바둑으로 나그네와 놀기 좋아하네.

목민관은 비록 은혜 드러냄 부족하지만 백성들 밭 갈고 우물 파서 때를 따르니 굶주리지는 않네. 해변 풍속이 글에 능하니 촉(蜀)의 교화(敎化)를 옮겨놓은 듯 섬 오랑캐 검정을 숭상하여 진(秦)나라 옷을 입었구나. 뜰 앞의 백일홍 이제 막 붉어지기 시작하고 들 벼는 한여름 더욱 푸르름 짙어가네. 촌 늙은이 배 두드리고 사또는 휘파람 부는데 도에 넘치는 뉘가 망령되이 시비하는가. -


* 김차웅 : 검경합동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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