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적용과 별개인 단순 양아들 문제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은 억울한 일과 마주하게 된다. 때론 상식 밖의 일일 경우, 황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도 법적으로 끌고 가고야말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작은 일도 커질 수가 있다. 배운 사람이 배우지 않은 사람보다 그런 일에 익숙해 있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왜 우린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크게 보려하는가. 배려심이 빈곤해서일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법조계에서 단순 양아들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의 초점에서 보듯 사회적 저명인사인 그가 선거법을 위반했다하여 법원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사유는 그가 어떤 돈 많은 사업가의 양아들이라 했다하여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격세지감이 들었던 나로선 단순 양아들이 무슨 문제가 될까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옛날에 흔하디흔한 양아들 문제를 지금의 잣대로서 타깃으로 삼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사 그가 양아들이었다 해도 양아버지의 성씨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으론 효력이 없고 또한 양아버지의 직계 친자나 친손이 그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만 봐도 단순 양아들에 불과함을 알 수가 있지 않을까.
양아들의 사전적 의미는 ‘아들이 없는 집에서 대를 잇기 위해 동성동본 중에서 데려온 조카뻘 되는 아이이거나 입양에 의해서 자식의 자격을 얻은 사람을 두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학술적으로나 법적으론 그렇다. 그러나 단순 양아들이라 하면 법을 떠나 관습적으로 얼마든지 성립될 수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6~70년 전만 해도 당사자끼리 서로 구두로 언약만 하면 의로 맺어진 의형제처럼 의부자 즉 의아버지, 의아들의 관계가 쉽게 맺어졌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 의부자를 일컬어 양아버지, 양아들이라고도 했다. 의부자란 말은 마을어른들로부터 들어서 안다. 의형제는 어떤 경우인가. 동성이거나 동성이 아닌 사람끼리 형제의 의를 맺는 일이 그것이다. 죽고 못 사는 사이면 바늘로 서로가 손가락의 피를 내 섞기까지 했다. 이 또한 풍습이었다.
이런 풍습에도 불구하고 의아들과 같은 양아들의 관계를 왜 법적으로 비화시키려는가. 난 어릴 때 마을에서 의아버지, 의아들 내지 양아버지, 양아들로 정해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을 더러 봤다. 양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아도 의아들, 양아들로 하자면 그렇게 했다. 이게 지난 날, 우리사회에 횡행하던 풍습이기도 하다. 풍습은 미풍양속으로서 법과는 별개이다. 법은 법이고 풍습은 풍습이 아닌가. 양아들을 단순하게 의아들처럼 선의로 보면 되는데도 그렇지 않으니 그게 탈이다. 거듭 말하지만 양아들이란 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를 수가 있음에도 옛날의 풍습을 현재의 잣대나 법적으로 본다는 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국어사전에 양아들이란 뜻의 범위를 추가해야 된다는 생각도 든다.
양아들이란 말이 문제가 돼서 하는 말이지만 풍습에 의해 의아들, 양아들이 됐는데 지금의 잣대로 아니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관습도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단순 의아들이나 양아들은 단순 의아들이나 양아들로 봐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 양아들의 관계를 법적으로 보면 문제 안 될게 없다. 옛 방식이지만 맘에 들거나 친하면 굳이 성이 같지 않아도 의아들, 양아들이나 의아버지, 양아버지라 하여 서로 가까이 지냈다. 이런 풍습을 왜 지금에 와서 인정을 하지 않는가. 아무리 법이 만능이라도 예외 없는 규칙은 없고 지난날의 풍습은 풍습일 뿐 법과는 별개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미풍양속의 향수랄까. 이웃 마을의 한 어른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양아들의 사례는 이러했다. 어느 산골에 살던 어떤 젊은이가 낚시를 하다 심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다 죽음 직전에 있었다. 마침 갯바위에서 해초를 캐던 60대의 어부가 물속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다. 어부가 아니었으면 젊은이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성이 달라도 평소 양아버지, 양아들의 의를 맺고 한집에 사는 가족처럼 오순도순 오래도록 지냈다는 것이다. 이 선린과도 같은 끈끈한 관계를 누가 부정한단 말인가.
이런 미풍양속이 성행하던 시대에 살았을 그가 양아들 문제로 인해 불이익을 받다니 제3자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어떤 사람과 양아들, 양아버지의 의를 맺었기에 그런 사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통하지 않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로선 양아들의 미풍양속을 알기에 양아들이었다는 그의 말을 살갑게 믿는다. 왜 일까. 이는 선행 등 그의 행적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고 유추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선행은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이때 들어간 돈만 해도 상당한 액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돈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가 단순이든 아니든 실질적인 양아들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런 돈이 쉽게 생겼을까. 여기서 그가 모한 사람의 양아들이란 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고도 믿지 못하겠는가.
상식적으로 판단할 일이지만 그가 말하는 양아들은 시대적인 산물로서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고 보면 그로선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다. 이처럼 그의 양아들 건은 인정에 의해 성립된 단순 문제여서 이는 법적으로 볼 때 정상 참작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사업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실관계 등을 살펴보면 양아들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그 속에 들어있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글을 보며 정치적으로 그에 대한 편향적인 색채가 짙다고 꼬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그를 언급한 것은 그가 단순이라도 양아들의 위치에 있었기에 재산적 혜택을 입을 수가 있었는데도 이에 대한 정황은 묻어둔 채 스스로 양아들이라 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적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의아들, 양아들의 풍습을 아는 사람으로서 이의 구제책을 찾아보자는데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그가 양아들이라 하지 않고 의아들이라 했으면 법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의 차이에서 빚어진 그의 양아들 문제. 여기서의 양아들은 단순이었음이 소명됐어야함에도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무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사건의 추이로 볼 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면복권이 이뤄져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재심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 김차웅 :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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